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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건에 짧은 명(銘)을 새겨 오래 쓰는 생활

CRAFT & ARTISAN #04

물건에 짧은 명(銘)을 새겨 오래 쓰는 생활

우리 옛 문화, 기물명(器物銘)에 대한 이야기

기물명은 우리 선조들이 사물에 이름을 지어 새기고, 사물과 벗하던 문화를 일컫는다. 그렇다. 기물에도 이름이 있었다. 예부터 사물에 이름을 지어 새기고, 부르면서 오래도록 그 물건을 사용했다. 물건과 어울리는 시한편을지어새기기도했다.그물건을 사용할 때마다 새긴 시구를 보며 마음을 다스렸다. 그 시구란 아래와 같은 것이다.

속을 비워 물 받아서
필요할 때 흘려내니
없는 데서 효용있는
도 여기 있으렷다

조선 후기에 활동한 문신이자 서화가인 농암 김창협이 연적에 새긴 기물명이다. 과연, 연적은 비워야 물을 받아서 쓸 수 있으니 비움에 효용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사물의 이치를 말했을 뿐인데도 곱씹을수록 그 맛이 새롭다. 연적의 쓰임을 생각하며 지은 이 시구 한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연적은 필요할 때를 위해 속을 비워두고 언제든 자신이 가진 것의 전부인 귀한 물을 내준다.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는 친구가 있다면 아마도 나는 그 친구에게 평생의 의리를 약속할 것이다. 작은 물건 하나가 이토록 나에게 헌신적인데, 한 번도 그것에 대해 감동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연적을 쓰지 않았기 때문은 아니다. 잠시 부엌으로 가면 이와 닮은 친구를 금방 만날 수 있으니까. 오늘도 물을 끓여 따뜻한 차 한잔 마시는데 사용한 주전자다. 주전자 역시 속을 비워 물을 받아서, 필요할 때 흘려낸다. 심지어 뜨거운 열도 견딘다. 도(道) 여기 있으렷다! 작은 연적에 새긴 명에 도(道)까지 운운한 연유가 이것이었을까? 이 시구를 생각하며 주전자를 보고있으니 절로 고마운 마음이 든다. 오래쓴 흔적이 새것을 사야 하는 이유가 되기보다는, 그저 정겹게만 느껴진다. “네가 나를 만나 고생이 많구나” 하며 토닥여주고 싶어진다. 오랜 친구가 같이 있는 것처럼 편안해진다. 이것이 바로 기물명이다.

[얇고 하얀 천에 자수를 새기다]

하얗기는 구름이요, 따숩기는 비단이라
덮고 자면 꿈결도 달콤하네

위에 쓴 시는 조선 중기의 문신 황정욱이 지었다. 궁여지책으로 덮은 종이 이불 하나를 생각하며 ‘하얗기는 저 하늘의 구름과 같고, 따숩기는 비단과 같다’고 말하는 그의 생각이야말로 참으로 달콤하다. 기물명이란 이토록 물건을 소중히 생각하는 가치관이다.
옛 기물에는 아름다운 시구를 새겨 전해 내려오긴 하지만, 모두가 그럴듯한 문장을 새기진 않았을 것이다. 할머니가 베갯잇에 빨간 꽃잎을 수놓고 그것을 ‘꽃님’이라 불렀다고 해도 이는 사물에 이름을 짓고 벗했다는, 틀림없는 기물명 문화다. 기물명은 옛 선비들이 그랬듯 다짐을 새기는 목적으로 시작해 사물의 쓰임을 생각하고 그 특성을 표현한 것이 될 수도 있고, 사물과의 특별한 인연을 생각하며 지을 수도 있다. 그 사물과의 추억을 기록하는 형식으로 나중에 새겨 넣을 수도 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아무 관련 없는 추상적인 단어 하나를 새길 수도 있다. 자신이 새긴 기물명에 대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다. 물건을 오래 쓰고 싶어서 새긴 거니까 자신에게 의미가 크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즉 기물명에는 잘하고 못하고를 따지는 평가가 필요 없다는 점을 기억하자. 기물명을 ‘지극히 사적인 문학’이라고도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누구도 평가할 필요가 없으며, 누구도 평가받을 필요가 없다. 내가 그를 벗하겠다는데, 거기에 다른 설명은 필요 없는 것이다.
결국 기물명과 관련해 ‘반드시 이래야 한다’라는 것은 없다. 전통이란 그런 것이다. 반드시 지켜야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우리가 우리 것을 소중히 하기 때문에 해나가는 일이다. 물건을 벗처럼 여기고, 그래서 소중히 생각하고, 오래 쓰려고 하는 마음이야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니까. 그 마음과 정신을 말하는 것이 기물명이다. 이미 지금도 많은 이가 일상에서 기물명 문화를 지켜나가고 있다. 펜에 무언가를 각인해 선물하고, 손수건에 이니셜을 새기는 것들 말이다. 부디 잃어버리지 않도록.
작고 가벼운 물건에 명을 지어 새겨보자. 쓰임이 다하지 않았는데 쉽게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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